영화배우이자 유니세프 친선대사였던 오드리 햅번

생각노트/나만의 인생철학
 2013년 7월 9일, 아침독서10분. <생각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영화배우이자 유니세프 친선대사였던 오드리 햅번" 

 

똘망똘망한 눈에 특유의 헤어 스타일 그리고 빠져나올 수 없는 도도한 매력. 영화 배우 오드리 햅번은 단지 외모가 아름다웠던 배우가 아니라 마음이 더 아름다웠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01 죽음의 고비를 넘겼던 아기

1929년 벨기에 브뤼셀의 한 병원에서 생후 3개월이 된 갓난아기에게 백일해라는 병을 진단 받았습니다. 심각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와 엄마의 보살핌 덕분에 극적으로 살아났지만 10살이 되었을 때 부모가 이혼하게 되었고 나치의 추종자였던 아버지는 아이를 떠나고 할아버지 손에 맡겨졌습니다.

 

 

 

02 발레리나의 꿈을 가졌던 소녀

오드리 햅번은 발레를 좋아해서 발레리나의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70cm가 넘는 키 때문에 이룰 수 없었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영국을 향했고 연극과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그러다 연극 <지지>에 캐스팅이 되었고 이 작품을 계기로 <로마의 휴일>에 출연하며 일약 스타로 부상했습니다.

 

 

 

03 영화 배우로서의 화려했던 전성기

오드리 햅번은 제7회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제26회 미국 아카데미, 제19회 뉴욕 비평가 협회상에서 여우 주연상을 받았고 이 후 <사브리나>, <전쟁과 평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마이 페어 레이디>, <언제나 둘이서>, <백만달러의 사랑>등의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04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제2의 인생

1989년 드리햅번은 우연히 참석한 기금모금 행사에서 자신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것에 감사해 유니세프를 먼저 찾아가 친선대사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어릴적 백일해 때문에 죽음을 경험했기에 전쟁 피해 아동의 구호와 저개발국 아동의 복지 향상의 중요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05 삐딱하게 보는 사회의 시선들

그녀의 마음과는 달리 그녀의 행동에 대해 사회는 '인기가 떨어지니까 별 쇼를 다하는구만' '몇 달 저라다가 말겠지' '자기가 아직도 공주인 줄 아나 봐' 라며 곱지 않게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발길은 아프리카 전 지역을 비롯해 전세계 50여 곳에 닿았습니다.

 

 

 

06 그녀의 진심이 세상에 울리다

그녀의 끝없는 행보에 언론과 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아이들을 만지고 고통 앞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 사람들은 함께 울었으며 각국에서 구호물자와 기부금들이 모였습니다. 특히 소말리아의 심각함을 알리고자 더 노력했지만 이 선택이 결국 그녀의 건강을 악화시키고 말았습니다.

 

 

 

07 직장암 말기 진단을 받을때까지 헌신한 오드리 햅번

오드리 햅번은 소말리아를 방문하기 전까지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취소되는 것이 두려워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통증이 올 때마다 진통제를 맞으며 일정을 소화했습니다만 결국 그해 11월 직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3개월의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고 1993년 1월 20일, 63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이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희생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위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걸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받은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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