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11대왕인 중종(진성대군) 그리고 조광조와 기묘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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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11대왕인 중종(진성대군) 그리고 조광조와 기묘사화

 

조선의 11대왕인 중종(진성대군) 그리고 조광조와 기묘사화

 

중종반정에 의해 얼떨결에 조선의 11대왕이 된 중종 그리고 그와 함께 개혁을 시도했으나 기묘사화로 인해 목숨을 달리한 조광조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01 반정에 의해 왕이 된 진성대군, 중종

조선의 11대왕인 중종(진성대군) 그리고 조광조와 기묘사화


1506년 중종반정이라고 하여, 연산군을 몰아내고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중종은 얼떨결에 11대왕이 되었습니다. 왕위에는 올랐지만 부인이었던 단경왕후가 연산군의 핵심인물인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위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02 반정공신의 3인방, 조광조의 등장

조선의 11대왕인 중종(진성대군) 그리고 조광조와 기묘사화


중종은 왕이 되긴 했으나 반정공신의 핵심 3인방인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의 파워가 워낙 세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재위 10년을 기점으로 3인방이 차례대로 사망하였고 이 때 조광조를 발탁했습니다.

 

조광조는 1510년 과거에 초시하여 장원급제하였고 알성시(왕이 별도로 내는 시험)에서도 2등으로 급제하면서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중종은 조광조의 대책문이었던 ‘왕은 성실하게 도를 밝히고 항상 삼가는 태도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말에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03 조광조 개혁의 시작, 위훈삭제사건

조선의 11대왕인 중종(진성대군) 그리고 조광조와 기묘사화


조광조는 중종의 지원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개혁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임금이 학문이나 기술을 강론, 연마하고 신하들과 국정을 협의하던 경연을 활성화 했으며 토지, 국물제도를 개혁하면서 기득권이었던 훈구력과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중종방종 때 공을 세운 정국공신 중 자격이 없다고 평가된 사람들의 공신호를 박탈하고 토지와 노비를 환수한 위훈삭제사건이 발발했습니다. 이로 인해 훈구파가 다시 한 번 힘을 내어 중종에게 조광조를 견제해야 한다고 설득합니다.

 

 

 

 

04 조광조가 숙청된 기묘사화

조선의 11대왕인 중종(진성대군) 그리고 조광조와 기묘사화


중종은 이런 훈구 세력들의 의견들을 들으며 불안한 마음을 갖고 흔들리던 중 주초위왕 사건이 발생합니다. 누군가 나뭇잎에 조가 성을 가진 사람이 임금이 된다라고 적었던 것입니다. 결국 불안한 중종은 조광조를 유배시키고 맙니다.

 

조광조는 처음엔 중종을 믿어 잠시 놓아준 것이라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1519년, 훈구파가 조광조 등의 신진 사류들을 숙청한 사건인 기묘사화가 발생하면서 조선 역사상 가장 개혁적이었던 조광조는 사약을 받게 됩니다. 이 때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깁니다. 애군여애부 우국여우가 : 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듯 했고, 나라 걱정을 내 집 걱정하듯 했노라

 

 

 


조광조가 사약을 받은지 5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기득권은 자신들이 가진 힘을 이용해 철저히 자신의 것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한 때는 그것들을 바꾸고자 노력했는데 지금은 멀리서라도 그런 이들을 응원하고 지원이라도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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